한국을 떠나 다른 국가의 다른 교육 시스템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언어로 교육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영어만 잘하면 다 잘 되겠지라는 단순 자기 합리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처음 국제 학교를 들어오면 부모나 아이나 정신이 없다.
아이가 정신이 없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모든 환경, 즉 언어나 다른 상황에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런 아이를 뒤에서 바라보며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느라 매일 손에 잡히는 것 없이 시간은 바쁘게 흘러간다.
영어를 잘 하는 상태에서 온다면 확실히 적응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유연한 생각이다.
영어가 우선 급하니 몇 개월 동안은 영어에만 올인하고 중국어나 말레이어는 아무렇게나 다녀도 돼, 악기는 무슨! 그것까지 할 정신이 어딨어?!
아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영역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의 틀을 점점 크게 넓혀간다.
설렁탕을 먹을 땐 숟가락을 쓰다가 반찬을 집을 때는 젓가락을 쓰고 스테이크를 먹을 땐 포크와 나이프를 쓴다.
살이 통통 오른 영덕 대게를 먹을 땐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U자형 같은 도구를 쓴다.
아, 때론 두 손가락만 있으면 될 때도 있다.
숟가락질을 많이 했다고 젓가락질을 잊지 않듯이 영어도 배우면서 중국어도 배우고 말레이어도 배우고 스페인어도 배운다.
수영도 하고 농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고 피아노도 친다.
그러니 말랑말랑한 우리 아이들의 스펀지 같은 뇌를 평가절하하지 마시길.
동시다발로 스미듯이 뭉근하게 배워 가다 보면 그 언어들이 지닌 차이와 이질적인 언어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된다.
접어본 자와 접할 기회도 없는 자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
모국어로만 이루어진 세계와는 현저히 다른 의미의 세계에 접속하는 열쇠가 언어다.
사람은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만큼 생각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국제 학교에 적응하는 데 영어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호기심이다.
이것에는 학문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운동 실력이나 악기를 다루는 영역도 포함된다.
한국에서 하던 악기나 운동이 있다면 국제 학교에 와서 방과후 클럽에 들어가는 게 학교 적응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뽐낼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라면 초기 낯선 환경에서 풀이 죽어 있던 아이의 자존감도 금세 상승하게 된다.
학교에서 행사나 대회를 하게 되면 공개 오디션을 해서 인원을 뽑는다.
이때 주저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register 버튼을 눌러야 할 것이다.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실패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힘을 실어주면 된다.
실패를 해야 실패가 별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다음을 위한 오기와 용기도 생긴다.
처음 한 번만 물꼬를 틀어주면 나중에는 흥미가 있는 이벤트가 나오면 아이가 먼저 submit 할 것이니 그때까진 옆에서 충분히 함께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아이에게 힘이 된다.
Music Festival
학교 뮤지컬 때 오케스트라 연주
말레이시아는 영국교육의 영향이 아주 큰 나라다.
그래서 아이들은 악기를 배우며 영국 음악 시험을 보고 Grade 딴다.
시험 주관사는 ABRSM, TRINITY 인데 Theory 와 Practical 시험이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악기를 하는 아이들은 매년 한 Grade씩 도장깨기 하듯이 딴다.
처음 왔을 때 아이의 친구들이 '넌 몇 급이야?'라고 계속 물었었다.
처음엔 뭔지 몰라서 '난 그런 거 없어. 한국에서 그냥 배웠어'라고 말하다가 궁금하기도 해서 Grade 시험을 봤다.
각 사이트에서 시험 신청을 하고 지정된 장소로 가서 시험을 보는데,
영국에서 심사위원이 오기 때문에 보통 호텔 한 층을 빌려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호텔 방에서 주어진 곡을 친다.
그래서 그 긴장감 때문에 다시는 안 본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Theory 시험은 7, 8급이 되면 시험 시간만 3시간이고 시험지가 글자 몇 개에 텅 빈 오선지, 그런 게 몇 장이었다.
아이에게 자세히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작곡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딴 Grade가 8급 이상이 되면 꽤나 쓸모가 있다.
영국 대학 원서 접수할 때는 이런 게 있으면 기입하라고 하는 란이 따로 있었고,
미국 대학 원서 쓸 때는 Activity로 많이 쓸 수가 있어서 충분히 그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아이가 즐겁게 여기고 하려고 해야 오랜 기간 동안 실력을 키우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각해 보면 동기 부여가 되는 그 순간도 예상치 못한 찰나의 지점이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모르는 것이니 많이 경험해 봐야 한다.
그러는 동안 생각도 자라고 마음도 자란 아이는 그만큼 성장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때까지 까칠한 아이의 가시 돋힌 말과 행동에 버럭하지 않고 삐죽 솟은 가시도 독특한 문양처럼 보일 때까지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도록
부모는 수없이 마음의 담금질을 하면서 굳건하게 북돋아 주어야 한다.
누구의 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카더라에 혹해서는 안 된다.
카더라에 몸이 움직이기보단 스스로 정확한 정보를 찾고 예리하게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좋다고 본다.
11월의 말레이시아는 확실히 우기에 접어든 느낌이다.
짧고 강렬한 섬광 같은 비보다는 뭉근한 아랫목 같은 느린 비가 오는 시간이 길어졌다.
한국의 장마철이 생각나기도 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풍겨오는 인도 마살라 냄새에 침이 고이는 나는 뭔가?
제철인 Honey Green 망고는 눅진하게 내리는 비에 지쳤는지 초록빛 그대로 익어간다.
다 익어도 짙은 녹색 그대로여서 오며 가며 손가락으로 자꾸 찌르게 되는데 속은 완전히 노오란 색에 물이 많은 녀석이다.
그래서 이름이 Honey Green 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고 갈비를 뜯어 본다.
Honey Green Ma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