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염색, 물들임에 대한 소회

mea-beatitudo 2024. 11. 21. 23:13

봄날 새순 올라오듯 뽀시래기 잡풀이 아니다.

당당히 두피를 뚫고 나와 스스로 위세를 더하며 검은 머리칼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흰머리.

새치가 한 두개 나던 안달복달의 단계를 넘어선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매일매일 내 두피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시궁창을 향해 떨어지는 머리칼들을 보며 그나마 머릿수를

채워주며 옅은 두피를 안아 견디고 있는 흰머리도 고마운 존재임은 두말할 필요없다.

일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 살고 있어서 흰머리로 변절하는 머리칼들이 유독 많은 것인지, 결국은 져 줄수 밖에 없는 부모라는 기울어진 운동장같은 숙명속에서 매일 사춘기들과 고래힘줄로 팽팽한 씨름을 하고 있어서인지,

흰머리는 잘도잘도 자란다.

마음먹고 거사를 치루듯, 경건한 마음으로 장갑을 끼고 메스를 들듯 도끼빗을 들었다.

남편의 머리를 먼저 2대 8로 바람이 이랑을 가르듯 빗질을 한다.

화장실에서 상의를 벗고 잘익은 망고같은 곡선을 이룬 뱃살을 어루만지며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새초롬이 앉아 있다.

염색약을 나도 나눠써야함으로 빠른 빗질은 필수.

빈틈없이 꼼꼼히 머리칼을 색칠하듯 그렇게 이를 잡듯 온 머리통을 휘몰아친 후 나의 빗질은 끝이 났다.

 

이윽고 내 차례.

전두엽에 모든 신경이 몰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뒤통수에 있는 간뇌, 소뇌들은 별 세월의 풍파를 겪지 않는 것인지 앞쪽으로 몰려있는 백의의 군단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행과 열을 맞춰 빈틈없이 쳐발쳐발.

 

감이 빨갛게 익어 오르길 기다리는 심정으로 일정의 시간을 보낸 후 헹구어 낸 머리.

잘 스며들었구나.

계절의 변화도 없고, 요즘같은 코로나 시절에는 일상의 변화도 별로 없어서 거울을 볼 일도 별로 없었다.

사람 만날 일도 잘 없는 생활이어서 옷가지도 별 관심이 없어지고, 비누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후론 세안 후 로션도 바르지 않게 된 삶이 되었다.

문득 손을 씻고 물기를 털다 바라본 거울 속 나의 주름진 모습도 어제 본 그 얼굴이라 익숙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염색을 한 후, 거울을 바라봤을 때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와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선사해 주는 망각과 능청스러움을 고마워하며 나이들기를 하고 있다고 믿었던 나였는데...

염색 후 말갛게 물든 검은 머리를 보고 이리 팔랑팔랑 설레고 있다니.

그동안 나 자신을 속이고 살았구나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젊어 보여서 이런 마음이 든 건 아닐 것이다.

거울 속에서 봤던 생기, 말갛게 떠오르는 뭔지 모를 열정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몇달 후면 다시 물망초의 꽃말을 내세우듯 흰머리 손님이 머리를 내밀며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난 양날의 칼과도 같은 염색용 빗을 꺼내어 최후의 전사처럼 머리칼을 휘갈길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말갛게 새로운 에너지로 태어날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노화란 참 오묘한 친구다.

반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내칠 수도 없으며 때론 위로의 시선을 보내는...